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개발일기 #0 ] 나는 왜 개발자가 되기로 했나
    카테고리 없음 2020. 1. 15. 22:04
    "저 개발자 하려고요."

    지금도 가끔 내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다녔던 거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하물며 직장 동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몇 번을 얘기해도 너 어디 이직할 생각이니 묻는 사람도 있었다. 행정학 전공, 영문학 이중전공의 순도 100% 문과 출신 영업/마케팅 직무 종사자. 개발자의 'ㄱ'과도 접점을 찾기가 어려운 게 사실이다. 도대체 나는 왜 개발자가 되기로 한 걸까.

    보통 개발자라는 직업에 대해서 사람들이 갖는 몇 가지 이미지가 있다. 이를테면 첫째, 개발자는 자유로울 것 같다. 집이든 카페든 노트북만 있으면 어디든 사무실이 될 것만 같다. 홍콩 여행을 갔을 때, 배를 기다리고 있는 내 옆에서 유유히 노트북을 펴고 코드를 짜는 개발자를 발견하고 기함했던 기억이 난다. 둘째, 전문성이 있어 보인다. 대학 시절, 개발을 공부하는 친구가 대화 중 나온 강의 출석체크 서비스를 뚝딱 만들어낸 적이 있는데, 너무 신기해서 이건 내가 따라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물론 절대 뚝딱 만들어낸 게 아니라는 걸 지금은 안다. 셋째, 돈도 많이 벌 것 같다. 이건 정말 그랬으면 좋겠는데 일단은 케바케인 것 같다.

     

    이러한 요소들은 분명히 내 선택에 큰 영향을 주었다. 나는 자유롭게 일하고 싶고, 나만의 전문 영역을 가지고 싶으며, 돈도 많이 벌고 싶다. 그런 맥락에서 개발자는 좋은 선택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한 설명이 되지 않는다. 조금 더 이전으로 가봐야 한다.

    대학 시절, 나는 우연한 기회로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반년간 인턴으로 일할 수 있었다. 솔직히 실리콘밸리가 뭔지도 몰랐다. 그냥 해외에 나가는 건 처음이라 좀 설렜던 기억이 난다. 그때 내가 얼마나 바보 같았냐면 누가 캘리포니아 가서 좋겠다, 얘기하면 '아 저는 샌프란 가는데요' 대답할 정도였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울 따름이다.

    그렇지만 미국 생활은 정말 굉장했다. 실리콘밸리가 어디인가. 애플, 구글, 페이스북 등 IT 대기업의 본진 아닌가. 오고 나서야 알게 된 것은 이곳이 스타트업의 성지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저 거인들도 한때 모두 스타트업이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스타트업 관련 부서에서 일하면서 창업가 및 예비창업자, 엔지니어, VC와 엔젤투자자들을 어깨너머로, 가끔은 직접 그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똑똑했고, 여유로웠으며 자신감이 넘쳤다. 그들과 함께 있으면 마치 나까지 멋진 사람이 된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다. 나는 사랑에 빠졌고 할 수 있는 만큼 그곳의 공기를 들이마셨다.

    당시 회사 분들은 여러모로 우리 인턴들을 예뻐하셨다. 업무 외에도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해주셨는데, 덕분에 우리는 피칭 행사를 간다거나, 인큐베이팅 프로그램을 함께 듣는다거나 할 수 있었다. 이렇게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어느 시점엔가에는 꼭 이런 질문을 받는다. 이제 한국 가면 앞으로 뭐가 하고 싶니. 나는 이 질문을 받는 순간이 그렇게 고통스러울 수 없었다. 동기들은 옆에서 착착 대답하는데 나는 정말 아무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멍청이가 된 기분이었다. 제발 이 질문 좀 하지 말았으면 하고 생각하며 적당히 얼버무렸던 기억이 난다.

    시간이 지나 출국을 한 달여 앞둔 시점, 평소 친절하게 대해주시던 매니저님, 지인인 VC 분과 식사를 할 일이 생겼다. 식사를 마쳐갈 무렵 여느 때와 다름없이 그 질문이 나왔다. 한 명씩 대답을 시작했고 맞춤형 멘토링이 진행되었다. 어느덧 내 차례가 되었는데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을 뱉었다. 세상에 좋은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세상에 내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한 거지. 옆에선 CPA니 뭐니 하는 얘기를 하는 중인데 좋은 영향이라니 이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린가. 멘토님은 그럼 국회의원을 해야 하는 거 아니냐며 웃었다. 이런 얘기 하는 사람은 오랜만이라며 어깨를 툭 치고 식사는 마무리되었다.

    나는 가끔씩 그 날의 대화를 생각한다. 지금이라면 함부로 뱉지 못할 그 말에 대해서. 좋은 영향이란 무엇일까. 영화 라라랜드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열정에 끌리게 되어 있어. 그들이 잊은 걸 상기시켜 주니까. 나는 항상 자기 세계를 창조한 사람들에게 나의 가장 큰 존경의 마음을 보내왔다. 작가는 글로써 자기의 세계를 창조한다. 위대한 정치인은 비전으로 자신의 세계를 제시한다. 기업가는 제품과 서비스로 자신의 세계를 표현한다. 자신의 세계를 만들기 위해 꼭 대단해질 필요도 없다. 시골 학원 영어강사도 수업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낼 수 있다. 사랑을 가진 사람만이 자기 세계를 만들어낼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좋은 영향을 만들어낼 수 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면  생각은 이렇다. 개발은 훌륭한 창작의 도구다. 개발을 배우면 코드를 통해서 자신의 세계를 표현할  있다. 그게 페이스북 같은 엄청난 서비스를 만드는 일이든, 시시껄렁한 게시판 하나를 만드는 일이든 상관없다. 새로운 도구를 익히고 그를 통해서 무언가를 만들어낸다는  중요한 것이다. 나는  도구를 다루고 싶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있던 , 그곳의 사람들과 계속 이어지는 방법이라고 느낀  같다.

     

    비장하게 써놓긴 했지만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공부를 시작하는 데 시간이 꽤 걸렸다. 퇴사 이후 곧바로 공부에 달려들 줄 알았으나, 코스 등록만 해놓고 여러 핑계로 놀러 다니기 바쁘다 연말이 다 돼서야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코드스테이츠 프리코스 수료를 앞둔 지금은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어찌어찌 수료는 하겠구나 싶은 안도감이 첫째, 다른 사람들과 내 코드를 비교했을 때 오는 자괴감이 둘째다. 이래서 IAT는 어떻게 보며, 이머시브는 잘할 수 있을까 현타가 오기도 하지만 그냥 넘기기로 한다.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고 걱정도 되지만 한편으로는 늦은 나이에도 다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에게 준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나는 몇 달 뒤 부트캠프가 끝났을 때 내 모습이 기대된다. 다소의 고생길이겠지만 아무튼. 화이팅이다.

    댓글